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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로부터 탄생한 생명의 시계
한국 최남단의 도시, 서귀포는 그 이름의 유래가 기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웠던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아 나선 서불이 서쪽으로 되돌아간 포구라 하여 붙은 이름인 것. 서귀포에 얽힌 이야기대로 진시황은 죽음을 꽤나 두려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는 불로불사의 비법을 찾아 헤맸으며 이를 이용하여 엉터리 비급을 들고 온 온갖 사기꾼들에게 막대한 재물을 번번이 쏟아붓곤 했다. 서불도 바로 그런 사기꾼 중 한 명이다.
진시황의 이야기는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인류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잘 보여준다. 진시황처럼 불로불사를 갈망한 사람들은 전 세계 문화권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신화인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가시에 찔리면 젊음을 되찾는' 식물이 등장하고 젊음의 샘이나 현자의 돌에 얽힌 전설에서도 영원한 젊음을 찾는다는 주제가 되풀이된다. 문제는 영원한 젊음이 어디까지나 신화나 전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진시황 역시 불로초를 찾아 여기저기 사람을 보내고 그 자신도 불로불사의 비법이라 전하던 수은 복용을 꾸준히 하다가 말년에 수은 중독으로 고생했으니 이만큼 허황된 소망도 없다.
영생을 얻은 세포와 유전자 시계, 텔로미어
불로불사는 허구의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수명 연장의 꿈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과학의 영역이다. 실제로 인류의 평균 수명은 산업혁명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거의 2배에 이르렀다. 세포 수준에서는 아예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누리는 것도 있다. HeLa 세포가 대표적인 예로, 이 세포는 외부에서 영양이 공급되는 한 영원히 생장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궁경부암을 앓던 헨리에타 랙스라는 미국인 여성에게서 적출된 암세포로 환자의 동의를 얻지 않고 무단 채취한 '불법' 세포로도 유명하다. 죠지 가이 박사가 1951년 배양에 성공하여 헨리에타 랙스의 이니셜을 딴 HeLa라는 이름을 붙인 이래 이 세포는 수많은 연구에 활용되어 2009년까지 6만 여 편의 논문을 탄생시켰다. 현재까지도 전 세계의 연구실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HeLa 세포가 어떻게 영생을 얻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텔로머레이즈라는 효소가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어 텔로미어가 줄어들지 않아 지속적인 생장이 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텔로미어(telomere)는 그리스어로 끝을 뜻하는 텔로스(telos)와 부분을 뜻하는 메로스(meros)에서 유래한 용어로 말 그대로 염색체의 끝에 붙어있는 특정 염기서열을 일컫는다.
텔로미어는 그 자체에는 별다른 유전정보가 없지만 염색체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생명 정보를 담은 DNA의 복제 메커니즘이 완벽하지 않은 탓이다. DNA 가닥에는 방향성이 있어서 복제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일어난다. 즉, 새로운 복제가 시작되지 않는 이상 일단 복제가 끝난 곳에서는 다시 복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제는 DNA가 복제될 때 '프라이머'라는 짧은 RNA 가닥이 시작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프라이머는 RNA 분자이므로 복제 종료 후 DNA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 따라서 프라이머가 떨어져 나간 부분은 복원되지 않아 복제된 DNA의 길이는 원본에 비해 짧아진다.
텔로미어는 일정한 염기 서열이 여러 번 반복되는 부분으로 일종의 '자투리' 역할을 하여 DNA의 길이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텔로미어 자체에는 별다른 유전정보가 없고 복제의 시작점 역할을 할 뿐이다. 따라서 복제가 끝난 후 잘려나가도 유전정보 자체에는 영향이 없다. 잘려나간 부분은 텔로머레이즈라는 효소가 다시 복원해주므로 DNA가 여러 번 복제돼도 처음의 유전정보를 손실 없이 유지한다.
그런데 텔로머레이즈는 끊임없이 복제되어야 하는 줄기세포나 암세포에서만 활성화될 뿐, 대부분의 일반 세포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 결국 DNA의 복제가 계속될수록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져서 일정 회수의 복제를 거치면 유전정보가 보호받지 못하게 된다.
텔로미어가 사라진 염색체는 다른 염색체와 결합하기 쉬워져 염색체가 융합하는 것과 같은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이러한 염색체 이상이 감지된 세포는 곧 파괴된다. 결국 텔로미어가 세포 파괴의 카운트다운 역할을 하는 셈이다.
텔로미어는 노화현상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세포가 어째서 일정한 수명을 지니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체 차원의 노화현상을 텔로미어만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진화의 부산물, 노화
텔로미어에 대한 연구가 200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면서 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일조하기는 했지만 노화란 단일 원인으로 설명될만한 현상은 아니다. 생물학적 현상으로서 노화는 간결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노화의 양상이나 경과가 제각각이라는 점만 보아도 노화에는 텔로미어 이상의 다양한 원인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물학의 태동기까지 노화는 단순히 신체의 기관이 시간에 따라 '마모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몸의 여러 장기가 나이에 따라 기능이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활성산소'로 대표되는 자유라디칼로 인한 세포 손상이나 노폐물의 누적에서 노화의 원인을 찾는 이론들도 신체적 마모 이론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현대 생물학에서는 노화의 원인을 세포 수준의 화학작용에서만 찾지 않는다. 화학작용은 세포나 조직의 손상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종마다 정해진 수명이나 대체로 일정한 노화의 진행 양상들을 고려하면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노화 이론은 생물학 전체를 관통하는 통합 이론인 유전학과 진화학에 기반을 두는 편이다.
진화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노화의 메커니즘은 아주 단순하다. 노화는 보통 성적으로 성숙하여 생식이 가능해진 이후 시작된다. 이는 성 성숙 이전에 사망한 개체의 유전자는 자연선택 과정에서 유전자 풀에서 제거되는 반면 자손을 남긴 이후에는 개체가 죽더라도 유전자는 후대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즉, 성 성숙이 일어나기 전에 생존에 불리한 형질이 나타나면 선택 압력을 강하게 받아서 다음 대에 살아남지 못하지만 생식 후에 나타나는 치명적인 형질은 자연선택의 영향이 적어 후손에게 그대로 전달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세대를 거듭할수록 생식 후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불리한 형질들이 축적되어 생식 후 나이가 들수록 신체 기능이 저하되고 죽음에 이르는 노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요컨대 노화는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 '부산물'인 셈이다.
그래서 한때 기대를 모으던 '단일한 노화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개체의 수명이 미리 프로그래밍된 유전인자가 있으려면 노화현상이 진화적으로 유리한 명백한 이유가 있어 선택되어야 하는데 노화가 나타나는 진화적 메커니즘은 그 반대기 때문이다. 다만 텔로미어 외에도 체내에서 세포의 생존을 결정하는 '장수 유전자'나 '시계 유전자'가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렇다면 노화와 관련된 유전인자를 충분히 구별해내기만 하면 노화를 늦출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들 다양한 유전자와 단백질들이 복잡한 생체 내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작용하며 노화나 세포의 수명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생물학 패러다임이 생명 현상을 단일 화학반응으로 분석하여 연구하려던 데서 세포 차원의 유기적 네트워크로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노화의 원인 규명이 한층 더 복잡해진 셈이다.
결국 현재로서는 노화 자체를 막는 방법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노화를 일으키는 생물학적 '마커'를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에서도 당뇨나 고혈압, 치매와 같은 증상을 질병으로 다룰 뿐, 일반적인 노화는 질병이 아닌 현상으로 본다. 그래도 어떻게든 노화를 늦추고 싶다고? 간단하다. 모든 인류가 가급적 늦게, 아주 늦게 아이를 낳으면 된다. 생식 시기를 마흔 살 정도로 늦추면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40세 전에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형질들은 자연선택으로 사라지고 40 이전의 노화 속도도 늦춰질 것이다. 몇 세대가 걸릴지도 모르고 생식 후 급속한 노화가 일어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