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의 미래를 꿈꾸다
IBS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 연구단장 유룡 KAIST 교수
국내 최초의 노벨화학상 후보에 오르다"톰슨로이터의 화학 부문 노벨상 수상 예측 후보(Thomson Reuters Citation Laureate, Chemistry). 기초과학연구원(IBS) 및 KAIST 소속의 유룡. 기능성 메조다공성물질의 설계에 대한 공로."
KAIST 화학과에 자리한 IBS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연구단 유룡 단장의 연구실에 들어가자, 유 단장이 톰슨로이터로부터 받은 증서가 책꽂이 한쪽에 놓여 있다. 톰슨로이터는 세계적인 학술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기관으로 매년 과학 분야별로 '노벨상 수상 예측 인물'을 선정해 왔는데, 올해 유 단장이 국내 과학자로는 처음 선정됐다.
많은 언론에서는 이 선정 소식에 이어 아쉽게 유 단장이 올해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KAIST 화학과 연구실에서 유 단장을 만나 이와 관련된 얘기를 들어봤다.
우리나라가 과학기술에 투자한 결실
"이제 오래돼 가지고…(웃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때가 되어서 (노벨상 수상 예측 후보로) 선정된 것 같아요. 로또로 된 건 아니니까요(웃음)."
톰슨로이터가 선정한 '올해의 노벨상 수상 예측 인물(화학 분야)'에 국내 최초로 선정된 것을 축하한다는 말에 유 단장 특유의 '직설화법' 답변이 돌아왔다. 무슨 말일까.
"우리나라가 과학기술에 제대로 투자한 게 언제부터인가요? 1990년대죠. 길게 잡아도 20~30년 정도 됐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우리나라가 굉장히 빠른 것이라고 봅니다." 유 단장은 이번 선정이 개인적으로 축하받을 일이라기보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과학기술 분야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비를 투자한 결실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선정에 대한 뒷얘기를 들려주었다.
"톰슨로이터로부터 e메일로 받았는데, 처음엔 한 분야에서 100대 과학자 중 한 명으로 뽑힌 줄로 착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자세히 보니, 3팀만 뽑은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소속기관의 홍보팀에 연락했죠."
유 단장이 내놓은 연구성과는 현재 총 2만 회가 넘는 인용 횟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중 인용 횟수가 1000회가 넘는 논문만 3편이나 된다. 톰슨로이터가 단순히 인용 횟수만 검토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4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먼저 해당 연구분야별로 지난 20여 년간 인용 횟수를 기준으로 상위 0.1% 이내에 포함되는 연구자들을 가려낸다. 이들 중에서 영향력 높은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한 연구자들을 선정한다. 다음으로 후보자 가운데 해당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이나 연구 분야를 창시하고 후속 연구의 성과가 얼마나 우수한지 평가한다. 끝으로 후보자의 연구성과가 얼마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인류사회 발전에 얼마나 공헌했는지를 판단한다.
진짜 노벨상 선정처럼 인용 횟수뿐 아니라 새로운 분야를 열었는지, 실용성이 얼마나 되는지 등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비록 유 단장이 노벨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권위 있는 톰슨로이터에서 '노벨상 수상 예측 후보' 3팀 중 하나에 뽑힌 것은 의미가 크다는 뜻이다.
문외한에서 한 분야의 개척자로 평가받기까지
"저는 물리화학의 촉매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구조 분석을 주로 했는데, 사실 물질 합성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죠. 우연히 1993년 외국 학회에서 MCM-41이란 실리카 다공성물질을 접한 뒤 그해부터 지금까지 나노다공성물질을 합성하는 연구를 계속해 왔습니다."
20년간 한 우물을 판 유 단장. 그는 '기능성 메조다공성물질 및 제올라이트' 분야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지름 5~20nm(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의 구멍으로 이뤄진 다공성물질을 주형으로 이용해 나노구조의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방법을 창안했고, 이를 이용해 큰 구멍과 작은 구멍이 함께 있는 제올라이트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CMK라고 통용되는 'KAIST에서 만든 탄소나노구조물'은 1999년에 그가 나노주형합성법으로 개발한 첫 작품이다. 2006년 이후부터 그는 제올라이트 골격으로 이루어진 메조다공성물질의 합성법을 개발해 '네이처', '사이언스'에 잇달아 발표했다.
그는 제올라이트를 들고 찍은 자신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명함을 보여주며, "2009년 '네이처'에 논문이 실릴 때 흥미 있는 논문으로 뽑혔는데, 저자 인터뷰를 했던 기사에 나갔던 사진"이라고 설명했다. 2009년 2nm 두께의 나노판 제올라이트를 합성해 '네이처'에 발표한 뒤, 2011년에는 큰 구멍이 있는 육각기둥 벽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 제올라이트를 합성해 '사이언스'에 게재했다. 이 성과는 2011년에 '사이언스'가 선정한 '올해의 10대 과학성과'에 선정되기도 했다.
유 단장은 세계적인 명성에 힘입어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았다. 2005년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상, 2010년 '제올라이트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브렉상을 수상했고, 2007년 국가과학자, 2011년 유네스코와 국제 순수 및 응용화학연맹(IUPAC)에서 선정한 '세계 화학자 100인'에 선정됐다. 2012년부터는 IBS의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연구단의 단장으로 임명됐다.
응용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아
그는 앞으로 나노다공성물질의 응용 분야에 대한 연구에 몰두할 계획이다. "연구팀에서 합성한 제올라이트를 진짜로 촉매로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이제 시간을 갖고 응용 가능성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주로 석유화학 촉매로 쓰일 수 있는데, 그 특성을 분석하고 연구해 실제 촉매를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죠."
유 단장이 이끄는 나노물질 및 화학반응연구단은 5개 그룹으로 구성돼 있다. 연구단은 기초 화학 연구를 통해 나노구조의 근본적인 형성 원리를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효율 나노 반응 촉매를 찾으며, '녹색 화학반응'을 이해하고 제어해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연합체의 총지휘자이지만, 연구주제는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각 그룹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IBS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동안 IBS가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홍보해 왔으며, 국제사회에는 우리나라가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선진국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 IBS가 우리나라 기초과학에서 상징적 기여 말고 실질적으로 큰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유 단장은 IBS에 대해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IBS 단장 같은 유명 과학자를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40대 초반의 젊은 과학자를 발굴해 지원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IBS 연구단의 젊은 구성원(단원)은 자신들의 위치를 계약직 포스닥으로 생각하는데, IBS 구조를 바꾸어 젊은 과학자가 대학교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정말 좋은 과학자가 전국, 아니 전 세계에서 몰려오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미래를 걱정하는 유 단장. 그가 어렵게 다져온 길을 많은 후배들이 따라오면 좋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한국의 첫 노벨 과학상도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