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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던 찰나를 보는 레이저 과학

빛


▲ 고구려 무용총 벽화. 고구려 무사와 동물들을 세세하게 묘사했지만 동물들의 움직임은 현재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어색한 부분이 있다.

머리에 깃을 동여맨 고구려 무사가 말에 탄 채로 활을 당기고 있다. 한껏 당긴 시위는 사슴과 호랑이를 겨누고 있다. 잠깐 사이에 저 무사들은 힘들게 잡은 사냥감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개선할 터다.

무용총 벽화는 전성기 고구려 미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곤 한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곳이 있다. 바로 말과 사슴, 호랑이가 뛰어가는 모습이다. 동물들은 하나같이 마구 내달리는 역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됐다. 앞다리는 힘차게 앞으로 뻗고 뒷다리는 방금 땅을 차고 날아올라 금방이라도 그림 바깥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다. 재미있는 점은 모든 동물들이 양쪽 앞다리와 뒷다리를 동시에 내딛는 모습이다.


▲ 영국 화가인 제리코의 1821년 작품, '엡솜의 경마'. 이 당시까지도 말이 뛸 때는 네 다리가 모두 지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 Musée du Louvre

네 발 포유류가 뛰어가는 모습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비슷하게 이해했던 모양이다. 1000년을 훨씬 넘겨 19세기의 영국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가 그린 그림에서도 말은 앞과 뒤 양 다리를 동시에 뻗고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네 발 포유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뛰어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뛴다면 마치 자벌레가 몸을 움츠렸다 펴면서 나아가는 것처럼 이상한 모습이거나 토끼처럼 뛰는 동안 위 아래로 심하게 요동칠 것이다. 사람이 걸을 때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건만 나름 충실하게 관찰한 대로 그림을 그린 옛 사람들은 말이 뛰어가는 찰나의 동작을 포착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시간'을 관찰해 낸 사진

동물들의 실제 움직임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바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계기는 일련의 연속 사진이었다. 영국의 사진가 이드위어드 머이브릿지(Eadweard Muybridge)는 19세기 중후반에 활발히 활동했던 작가다. 미국 요세미티 계곡의 사진으로 잘 알려진 그는 1872년, 지인인 릴랜드 스탠퍼드의 요청으로 말의 움직임을 담아냈다. 스탠퍼드는 자신의 목장의 말들이 걷거나 뛸 때 어떤 모습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 머이브릿지는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사진을 다수 남겼다. 그의 사진은 인기있는 기념품이기도 했다. 머이브릿지가 찍은 요세미티 폭포의 입체 사진. ⓒNew York Public Library


▲ 머이브릿지의 1878년 작품인 '움직이는 말'. 이 사진으로 말의 실제 움직임이 사람들이 기존에 생각하던 바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머이브릿지는 유사한 연작을 다수 남겼다. ⓒLibrary of Congre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머이브릿지는 레이스 트랙 옆에 12대의 카메라를 배치하고 트랙을 가로질러 스위치 역할을 하는 가는 실들을 걸쳐 놓았다. 말들이 지나가면서 트랙의 줄을 끊으면 줄에 연결된 카메라의 셔터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말의 음직임을 완벽하게 분석해 낸 사진들을 얻을 수 있었다.

머이브릿지의 사진은 기존의 상식을 깼다. 말은 결코 양 다리를 동시에 움직이지도 않았고 고전적인 그림에서 나온 것처럼 뛰어가는 동안 양 발을 기지개 켜듯 내뻗으면서 허공에 떠 있는 순간도 없었다. 말은 언제나 좌우 양쪽 다리를 교차시키면서 복잡하게 움직였다. 이 사진은 곧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학술지에 소개됐다. 여기에 재미를 붙였는지 이후에도 머이브릿지는 여러 동물들과 사람들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연속사진 작품을 여럿 남겼다.

머이브릿지의 작업은 동물의 실제 움직임을 분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878년, 학술지에 기고한 것이 인연이 되어 프랑스의 생리학자인 마레이(Étienne Jules Marey)와 알게 됐다. 마레이는 여러 그림을 빠르게 순차적으로 보여주어 움직임을 묘사할 수 있는 환등기인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를 만들고 있었다. 머이브릿지의 연속사진들은 주프락시스코프의 기능을 활용하기에 최상의 콘텐츠였다. 머이브릿지와 마레이는 1880년 파리에서 주프락시스코프와 연속사진을 이용하여 말과 다른 동물들의 움직임을 화면으로 재현해냈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이어붙여서 다시 그 사진이 포착한 시간들을 재생해 낸 것이다.


▲ 주프락시스코프의 사진. 오른쪽 아래의 원반에는 테두리를 따라 연속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디스크를 주프락시스코프에 넣고 작동시키면 원판이 회전하면서 연속된 그림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Kingston upon Thames Museum


▲ 머이브릿지의 사진을 이용하여 만든 동영상. 말이 뛰어가는 모습을 영화처럼 볼 수 있다. 당시의 주프락시스코프를 이용하여 본 사진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Waugsberg

머이브릿지와 마레이의 작업은 당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들의 작업은 눈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의 모습을 아주 미세한 시간 간격으로 보여줌으로써 동물과 사람의 움직임을 이해하게 했다. 발레리나 연작을 통해 인체의 순간적인 움직임을 정적으로 묘사해 낸 에드가 드가(Edgar Degas)나 시간에 따른 변화를 하나의 화면에 담아낸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이 머이브릿지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들이었다.

1000조분의 1초, 찰나를 기록하는 과학

지금이야 머이브릿지의 작업이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1초에 24컷의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는 물론이고, 요즘의 동영상 파일들은 1초에 60컷의 화면이 기본이다. 당장 컴퓨터에서 재생한 동영상 파일을 일시정지만 해도 1/60초라는 찰나를 관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로 보편적인 기술이라면 과학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연구실에서 딱히 특별한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연속사진'은 여전히 실험실에서 요긴하게 이용되고 있다. 동물들의 움직임이야 이젠 낱낱이 분석됐지만 분자 수준으로 가면 이야기가 다르다. 생명 현상을 일으키는 분자들의 움직임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효소가 분자와 결합해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펨토 초(femto 초, 1000조분의 1초)' 단위다. 1초에 30만km를 움직인다는 빛조차도 고작 0.3㎛ 정도밖에 이동하지 못하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생체 내에서 분자들이 어떻게 특정한 작용을 일으키는지 분석하려면 이 짧은 시간 동안에 분자들이 어떻게 결합하고 변형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 오늘날 펨토초 레이저는 활발하게 연구되는 분야 중 하나다. 미시 세계를 매우 높은 정확도로 관찰할 수 있어 다양한 연구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National Science Foundation, USA

사람의 눈은 1/24초 동안의 변화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느려터졌다. 성능이 좋은 카메라라고 해도 수천분의 1초 정도가 포착할 수 있는 한계다. 언감생심 펨토 단위의 시간은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다. 그러나 펨토 초 단위의 시간을 포착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레이저 펄스다. 대략 수십 펨토초 동안만 켜졌다 꺼지는 레이저 펄스(짧은 시간 동안만 켜지는 빛)를 분자에 쬐면 이 펄스는 펨토초 시간 동안만 분자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아주 어두운 실험실 안에서 물체가 움직이는 동안 10초 간격으로 0.1초씩만 플래시를 터뜨려서 사진을 한 컷씩 찍는다고 생각해 보자. 플래시는 아주 짧은 순간만 켜지지만 이 사진들을 순서대로 모으면 10초 간격으로 물체가 변화한 모습과 그 과정을 분석할 수 있다. 펨토초 레이저는 플래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펄스를 연사하면서 얻는 자료들은 마치 영화필름의 프레임(frame)과 비슷하며 이를 충분히 느린 시간으로 본다면 결국 '초고속 분자 동영상'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펨토초 레이저를 이용하여 만든 분자동영상의 개요도. 펨토초 레이저와 분광학을 이용하면 분자의 3차원 이미지를 동영상으로 관찰할 수 있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서울센터

물론 아주 작은 분자구조의 이미지를 현미경으로 보듯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레이저 펄스가 물체에 닿아 투과하거나 산란된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함으로써 그 구조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산란된 빛의 패턴을 찍은 사진만 있다면 높은 정확도로 실제 구조를 분석해낼 수가 있다. 이런 학문 분야를 분광학이라 한다. 펨토초 레이저를 이용한 분자구조 분석은 특별히 '다차원 분광법'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다차원 분광법은 이름 그대로 여러 개의 레이저 펄스를 분자에 쬐어 준 후 산란하거나 투과한 광신호를 측정하여 입체 정보를 얻게 하는 방법이다. 물체의 입체적인 모양을 파악할 때 정면도뿐 아니라 측면도와 입면도가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된다. 결국 펨토초 레이저를 이용하면 분자가 3차원 묘사된 생생한 동영상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펨토초 레이저를 이용한 분광법은 분자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분석해야 하는 화학과 생물학에 매우 요긴하게 이용된다. 이전에는 이론적으로만 추측하던 화학반응을 실제로 관찰할 수 있으며, 실제 반응 사진을 찍어서 이전에는 모르던 분자의 성질을 확인할 수도 있다. 산업 현장에도 매우 중요하다. 분자들의 실제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으면 화학제품 생산공정을 지금보다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고 특정 화학반응이 중요한 질병에 대한 치료약도 쉽게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150여 년 전의 사진 작품 하나가 동물과 인체의 움직임에 대한 이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듯 미시세계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는 펨토초 레이저 기술은 화학과 약학, 의료 산업을 급속히 발전시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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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3-11-28 14:20